줄루족의 부흥운동

(Revival among the Zulus)

 

              

 

1. 회심과 하나님의 부르심     

2.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 

3. 성령의 권능 

4. 초대 교회   

5. 죄의 깨달음과 부흥의 시작  

6. 성령의 역사 

7. 동반되는 이적과 기사 

8. 맺는 말     

 

 

 

 

 

1  회심과 하나님의 부르심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부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을 선포하는 일군으로 부르실 때에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나는 다른 생각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나에 대하여 말할 대에 "나는 도저히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고, 나도 그들이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친구들이 그들의 여자 친구들과 데이트하고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친구들처럼 행동하기 보다는 차라리 돈을 버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자 친구들과 데이트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 여자 친구들 보다도 더 가치있게 보였던 돈을 벌려고 노력하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돈이 먼저, 그리고 다른 것들은 다음에"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셨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다른 어떤 목사님들 보다도 더 설교를 잘하시는 대단히 훌륭한 목사님을 모시고 있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교회로 갈 때에 사탕을 가지고 가는 습관이 있었고,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면 보통 잠들게 되거나 사탕을 먹고 있게 된다그러나 우리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에 사태가 변화되었다. 그 목사님의 설교가 흥미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설교가 짧았고, 우리는 우리 목사님이 특별히 흥미를 끌게 함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목사님은 우리 어린이들을 잘 이해하고 계셨다.

      예를 들면, 부활절 때에 피터마리쯔버그 (Pietermaritzburg, 남아프리카 동부의 크와줄루 나탈, KwaZulu-Natal, 주의 주청소재지) 에서 자동차 경주를 하는 때인데, 우리는 우리 목사님에게 가서 목사님께서 설교를 짧게 하시면 우리가 그 자동차 경주에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다고 요청하곤 하였다. 목사님은 짧게 10분이나 15분 정도의 설교를 하시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 "우리 목사님은 우리들에게 적절한 훌륭한 목사님이시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목사님은 대단히 불행한 분이셨다.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그는 먼저 공부한 어떤 학생들보다도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들을 많이 받은 분이셨지만, 그의 마음은 평화스럽지 못하였음으로, 그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신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 머물면서 공부하였지만 거기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선교사 자격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교수들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왜 너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아프리카는 너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 유럽에 머물러 일하면서 너의 아까운 재능을 아프리카에서 낭비하지 말아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농담 삼아 "우리 남아프리카에는 많은 휘어진 바나나가 있는데, 그것을 당신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휘어진 바나나를 바로 세우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그의 조국인 남아프리카로 귀국한 후에도 그의 마음은 평정되지 못하였다. 그는 이런 마음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을 하였는데, 그 결과 그는 신경계통의 손상을 입게

되어 그의 의사는 잠시 그의 사역을 중단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런 자포자기의 현상 속에서 그는 프레토리아 (Pretoria,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에서 전도자 (evangelist) 로 불리움을 받았다.

      사실 그는 주변에서 그에 대한 많은 나쁜 소문들이 돌았기 때문에 전도자로서 좋게 평가 받지 못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6:26)라고 말씀한 곳도 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하여, 또는 어떤 곳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는 그냥 조용히 두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이렇게 단순한 전도자로서 이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된 믿음의 형제는 기도할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그가 방문자에게 말을 할 때에 그는 마음 중심으로부터 주님께 울부짖었다.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이 나를 부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그는 갑자기 이제까지 주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과 생활속에 계셨던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애 믿음처럼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심령 속에 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고, 이것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그의 무릎을 꿇게 하였고, 그의 심령 속에 평화로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때부터 그의 설교가 완전히 달라졌고, 분명하게 그의 생활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님께서 우리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다섯 형제였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강제로 교회로 가게 하였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만 하였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내가 성장한 다음에는 나는 이 모든 종교적인 요인들을 밖에 내쳐버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다 성장하기 전에 나에게 다가오셨다. 어떤 주일 아침에 내가 교회에 있었을 때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것과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가 교회를 떠날 때에는 언제나 집에 갈 때까지 논쟁을 했다. 나는 가끔 부모님께 불순종하여 왔다.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부모님께 부정적인 자세를 가졌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하기 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편에서 그런 일들이 죄였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 나는 교회에서 나는 당신을 위하여 살겠다고, 기도와 찬송을 하였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미 신앙문제로 논쟁하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불순종의 신앙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나는 아침에 기도하였고, 저녁에도 기도하였지만 내 생활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성장하면서 내가 지옥에 떨어지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면 내가 죄와 싸우기를 좋아하는 성품과 부모님께 불순종했던 삶의 자세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나에게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더 의식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대로 작은 죄나 큰 죄와 같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2:10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하신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21-22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언젠가는 이 말씀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회에 출석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나는 하나님 편에서 잃어버려진 죄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의 국적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또는 황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죄가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이 그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죄를 단절하기 전까지는 그 영혼은 죽는다고 말씀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내 생명을 변화시켜 주옵시고, 나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울부짖는 기도를 하였다.

      이런 기도를 하고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복음사역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소명을 받았다. 나는 우리 가족 계통에서 목사나 선교사로 사역하신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도저히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나는 돈을 사랑하였고, 돈은 나의 우상이었다. 내가 주님의 종이 된다면 우리 교회 목사님들처럼 가난뱅이가 될 것인데 말이다.

       솔직히,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대가를 크게 치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18개월 동안에 하나님께 반항했던 만큼 지옥을 통과한 셈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 나는 이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가 방황하였던 18개월 후에 불순종의 대가는 순종하는 것의 천 배나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셨다. 나는 누구든지 내가 겪었던 일들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와 같은 우유부단한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나는 하나님께 "좋습니다. 주님, 나는 복음의 선포자가 되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나는 교회에서 단순히 세례식을 행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집행하는 등의 일로서 일요일에 한 두 시간을 교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목사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지, 나는 교회를 가지고 놀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에게 지나친 대가를 지불하는 결과가 됩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사실은 내가 내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나는 결코 책벌레는 아니었고, 정말로 책 읽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서 독서시간은 나에게 마음의 큰 부담이 되어 왔지만, 예수님께서 내 심령에 들어와 계신 후에는, 나는 성경을 읽는 것이 그렇게 좋았고, 성경은 나의 가장 소중한 책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일도 하였다. 나의 형제들이 많은 속된 책들과 예쁜 소녀들의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들이 주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형제들이 모르게 이런 조잡한 책들과 사진들을 모두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나는 더욱더 성경에 내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친구들 집에 초청받았을 때에도,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있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내가 혼자 집에 남아서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했고, 언제나 선생님에게 나는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찬송을 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또 마음 중심으로부터 요한복음 15장과 17장과 같은 성경의 한 장씩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한 약속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놀랍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나에게 특별히 인상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5:7의 말씀인데, 그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여기에 돈보다 더 풍성한 부()가 있는데, 이것은 세상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생활이 가능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애는 성경에만 약속되어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간구하여 받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이것이 세상의 모든 보물들보다 더 존귀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생애가 얼마나 훌륭한 것이겠는가? 이런 일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내 마음에 차고 넘치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나에게 제공해 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우리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약혼하고, 결혼할 장소로서의 큰 무도회장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그곳에 모이게 하여 큰 잔치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내가 세상을 알지 못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까지 술에 만취하고 춤을 출 때의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착한 그리스도인들이고, 교회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을지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셨을 때에 우리는 이런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오직 주님과 그의 말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그 많은 약속들 모두가 세상이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보다도 더 사랑하게 된다.

       나는 되풀이하여 요한복음 14:12의 말씀을 읽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복음서를 찾아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행하신 일들을 찾아보았다. 나는 기도하면서 "! 주 예수님! 당신은 그 모든 말씀들을 실현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나는 요한복음 14:12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라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그것으로 머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상적인 이 말씀이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으면서도 가끔 며칠씩이나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가금 내 자신이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내가 주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결국 나는 그럴 수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임으로 나도 포함된 것으로 믿게 된다. 그 말씀에 따라 나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할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날들에 주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보배로운 일들을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나는 그 많은 성취된 사역중의 한 가지를 더 말할 수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24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함을 얻게 되는 완전한 즐거움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복음사역에의 부르심에 관하여 가끔 나는 "주 예수님!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면, 나는 주님처럼 설교하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님은 회당 안에서 설교하지 않으셨음으로, 나도 내 자신이 실내에서만 설교할 것이 아니라, 야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받아야 할 훈련을 마친 후에 주 예수님께서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하게하셨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백인들에게만 설교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흑인인 줄루족에게도 설교하게 하셨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특별한 일로서, 내가 회심하기 전에는 내가 태어났고, 자랐던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의 고질적인 사상과 정부의 인종격리정책(Apartheid) 등의 영향으로 나는 흑인들이 백인인 우리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같은 감각적인 느낌과 생각을 가졌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태도를 가졌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기까지 하다. 내가 전에는 그렇게 거절하였던 예수님을 영접하여 내 심령에 거하시는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나의 대부분의 시간을 흑인들을 위하여 그들 속에서 생활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남아프리카의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줄루족의 줄루어를 말할 수 없었고, 줄루어 설교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경멸하는 흑인들의 말을 배우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 때문에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내가 사역의 길로 나가야 하는 일을 준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하여야 하였다.

 

 

 

2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사도행전 19:1-7)

 

 

      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12년 동안이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나는 설교할 때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하시는 말씀을 직선적으로 설교하였는데, 나는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목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이 설교할 때에 조심하시오. 당신이 그렇게 진리를 설교하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버릴 가능성이 많아요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루족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당신들의 생활을 변화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지옥 가는 길에 들어서요" 라고 설교하였다.

     그 때에 줄루족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이 나타났다.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만, 당신이 알아야 될 것은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요. 우리 줄루족은 우리 자신들의 종교가 있소.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당신의 조상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줄루족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당신도 우리와 같이 되었을 것이요."

     "기독교는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방의 문명에서 많이 배웠고, 상당한 유익을 얻었지요. 당신들이 우리를 위하여 교회와 학교들을 지어주었지만, 기독교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전통을 지키기를 원하며, 우리들의 조상숭배를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여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아플 때에는 병을 치유하는 무당에게 데려가서 그 아이가 왜 아프고, 누가 저주하여 그렇게 아프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뱀의 몸속에 살게 되기 때문에, 그 떠난 영혼을 돌아오게 하고 예배들이기 위하여 축제로서 축하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작은 맥주병과 고기 한 덩어리를 이 축제 때에 죽은 자의 영혼 앞에 차려놓는 것이 우리들의 관습입니다." 이런 의식은 일반적으로 줄루족 막사의 뒷 뜰 벽에 특별히 설치한 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조상숭배가 귀신숭배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런 일들이 필요 없다고 알게 하였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설명하여 왔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불에 약간의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불꽃은 잠재우지만 달아오르는 불씨는 남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이 그들이 왜 옛 전통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그들의 의견이며, 모든 일들의 근원에 스며들어 있는 의견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것은, 당신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 모든 일들이 헛것이고, 만족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는 나는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오 주님! 오늘 예배드릴 때에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 주옵소서. 당신의 말씀을 주옵시고, 이들 줄루족 사람들에게 당신은 백인들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는 권능을 허락해 주옵소서."

      나는 조심스럽게 설교를 작성하고, 구약성경에서 시작하여 선지자들이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증거 하였다. 메시아의 탄생보다 600년 전이나 사역하였던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였다. 나는 줄루족 사람들에게 이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었음을 증거 하였고, 어떻게 주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고, 부활하셔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증거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슴으로 우리는 아직도 그의 뼈들이 있는 무덤에 갈 수 있는 모하메드를 예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죽어서 자신의 삶의 종말을 맺은 부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 죽은 신들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그는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 받았슴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부의 색깔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길 뿐 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시요, 진리 시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변화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그는 2천년 전에 오셨던 그대로 오늘도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그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나이 드신 여인이 나에게 와서 "므픈디시 (목사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이 참 말입니까?" 라고 물어왔을 때에 나의 설교가 겨우 끝날 수 있었다.

 나는 ""라고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며, 정말 살아계십니까?"

     ""

     "당신이 그 분과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당신도 그분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도라고 말하며,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분을 찾아서 매우 기쁩니다. 나에게는 성장한 완전히 미친 딸이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하나님께 그녀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나는 할말을 잊어버렸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나는 이 사람들을 궁색한 경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내가 도망칠 길도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어떻게 이 궁지에 몰린 환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이 여인을 곧바로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 앞에는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교도의 여인이 서있다.

      그 부인이 최소한도의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당신의 딸이 치유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또는 "이것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또는 "지금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딸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때라고 믿습니까?" 라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성경은 이런 문제들을 주님께서 정하신 때와 하나님의 뜻에 속한 것으로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로 말씀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런 모든 것을 이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교도의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를 혼돈하게만 만들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난처해졌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나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표면적으로 침착함을 보이면서 마침내 그녀에게 "당신의 딸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니오, 딸은 집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적은 시간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1km는 될 것입니다."

     "그곳에 차로 갈 수 있을까요?"

     "절반 정도는, 그리고 나머지는 걸어야 해요."

     "되었습니다. 조금만 시간의 여유를 주시오. 내 일을 마치고,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곳에 가는 길에서 그녀는 자기의 남편은 4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자기는 과부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이 딸이 하나요, 결혼한 아들은 남아프리카의 동남부 최대의 항구도시인 더반(Durban) 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녀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에 나는 그녀의 사는 오두막을 들여다보고 당황하여 "당신은 나에게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말하지 않았어!" 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그 오두막의 가운데 마루에 앉아있는 소녀를 보았는데 그녀의 양팔은 오두막의 가운데 기둥에 철사 줄로 묶여 있었다. 그 쇠줄은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것 때문에 많은 피를 흘리게 되어 온몸이 흉터와 상처뿐이었다. 그 상처의 일부는 나았고, 다른 곳은 아직도 상차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격렬하게 쇠줄을 잡아당김으로 그녀의 양팔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외국어를 말하였는데, 그때에 무슨 언어로 말하고 있었는지 분별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께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묶어 두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지난 3주간 동안 이 아이는 밤낮을 쉬지 않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무것도 먹지않고, 전혀 잠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식사할 것을 가져와도 그 접시를 받아서는 벽에 던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부드러운 것으로 묶어주지 않았습니까? 이 아이를 쇠줄로 묶어주는 것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것들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가장 튼튼한 밧줄도 끊어버리고 도망치는데 우리는 잡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는 이웃집의 밭이나 정원에 들어가서 양배추, 옥수수, 야채 등을 뽑아버리고 모든 것들을 파손시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두려워하여 어떤 사람들은 지팡이로 이 아이를 때리고, 이 아이에게 개를 풀어 놓습니다. 가끔 산에 뛰어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보고 "목사님은 이런 아이를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애절한 호소를 해왔다.

      여인은 그가 겪은 일들을 계속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옷을 조각을 찢어서 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뛰어다닙니다. 대단히 위험한 아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아이에게 물려서 큰 흉터까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을 물때에는 다른 사람이 구조하러 올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가지도 않습니다.

      한번은 이 아이가 학교에 뛰어들어 갔는데 모든 학생들이 두려워서 모두 창문들을 뛰어넘고 도망쳤습니다. 학교 운영위원회에서는 나에게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막게 해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나의 가축 우리를 보십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나 양이나 염소가 없습니다. 내가 가졌던 모든 동물들을 악령들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내가 죽이지 않았던 소들은 내가 팔아서 무당에게 바쳐서, 나에게는 더 이상의 돈도 없습니다. 이제는 내 힘이 다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매듭지었다.

"알겠어요. 나는 가끔 칼로 내 딸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자결해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무엇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 딸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누구도 이 아이를 돌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찾아서 그렇게 기쁨니다. 아마 아직도 소망은 있는 모양입니다."

      이 여인이 이런 말을 할 때에 나는 내 심장의 고동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오 주님! 당신은 그전에 역사하고 계셨던 바로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무엇인가 어떻게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몇 사람의 내 친구들을 찾아가서 내가 그들과 함께 보았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여인을 위하여 먼저 기도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농장으로 찾아가서 우리가 그녀를 위하여 기도할 동안에 그녀가 머물 수 있는 방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나의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여 방을 하나 준비할 수가 있었다. 나는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끌어내어 부모님의 농장 집으로 데려왔다. 그 지역의 전체 부족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보시오. 우리는 몇 년이나 부흥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여 왔지만 오늘날까지 실패하고 말았소. 아마 이번 사건이 때를 맞춰서 부흥의 불길에 불붙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소녀가 이 무서운 병에서 치유를 받게 되면 결국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부족 전체가 추장을 비롯하여 아이들, 젊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이 소녀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요. 이 소녀가 치유를 받게 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러면 줄루 부족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녀를 힘들게 데려와서 아름답게 장식한 방에 넣었으나, 소녀가 책상을 뒤 업고, 의자를 부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리는 방의 모든 가구들을 옮기고 침대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소녀는 침대 매트 속의 스프링 (용수철)을 뜯어내려고 하였슴으로, 우리는 침대도 방 밖으로 옮겼고, 방에는 소녀와 풀로 만든 매트인 "이칸시"와 모포만 남겼다.

      우리들의 피보호자인 소녀는 그 다음에 창문의 틀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몇 시간 사이에 방은 돼지우리처럼 되었는데, 한 마리의 돼지가 아니라 많은 돼지들이 살았던 우리와 같이 되었다.

     우리는 삼 주간이나 밤낮으로 기도하였으나 소녀는 낫지 않았다. 오히려 내 능력이 다하였고, 신경이 마비될 정도였다. 소녀는 쉬지 않고 사단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마귀가 두려워하고 도망칠 수 있도록 예수님의 피에 의탁하기를 권면하였는데 그것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소녀는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소녀는 되풀이하여 지긋지긋하고 신성 모독하는 노래들을 방에서 울러 퍼지게 하였고, 오직 사단만이 할 수 있는 주 예수님의 피와 죽음을 비난하는 말들을 하였다. 소녀는 거의 나체로 그의 배설물 위에 불건전하게 앉아 있었다. 소녀는 큰 망치로 파괴하려는 사람들처럼 맨발로 콘크리트 마루에 짓 뭉게고 있었다. 소녀는 이런 일을 끝나기까지 몇 시간씩이나 지속하고, 소란스러운 소리와 불건전한 노래가 멀리서도 들리게 되었다.

     나는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했는데도 그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들의 체험은 우리가 배운 이론에 어긋나고 말았다. 나는 창조주나 하나님도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이 세상의 똑똑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우리 사람은 몇 백만 년이나 몇 십억 년 전에는 아마 모두 진화론 과정에서의 물고기들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들 물고기들이 다리가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개구리류로만 진화되었을 것이 아니고, 원숭이도 되었을 터인데, 어떻든지 꼬리가 떨어지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론의 주장자들이 이런 진화과정에서 많은 연대들을 필요로 했겠지만 가장 정확한 자료들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진화론에는 진화의 과정마다 과정을 연결하는 고리들이 없어서 결환 (缺環, missing links) 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스미스 교수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진화과정에서 없어졌다고 믿었던 물고기인 코엘라칸트 (Coelacanth) 를 잡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때에 진화론주의자들은 이 물고기가 이 결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으나, 이것도 그것을 입증하지 못하여 그들을 크게 실망시킨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하여 나의 입장을 정확하게 정리하게 하였다; 진화론의 이론은 완벽한데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그 소녀의 어머니께 가서 당신의 딸이 치유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소녀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내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는 무당에게 가지 마시오. 귀신들에게 소나 염소들을 제물로 바치지 마시오.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해답자 이심으로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그곳 주민들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였다. 우리들은 전력을 다하여 "오 하나님!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들의 이름을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이 실패하였다고 말할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이들이 믿는 예수님이 실패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하늘이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우리들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단념하였고, 그 소녀를 강제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오 하나님, 간구 하노니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이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으며, 그들에게 설교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역사가 없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양심이 있는데 내 자신 만큼은 정직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들 후에 이 사람들에게 갈 수가 없었고, 백인들이 믿는 종교가 무가치한 것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일 좋은 것은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지금 어렵게 겪고 있는 환경에서와 같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성경 속의 모든 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참일 수 있고, 다른 부분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것이나 내가 겪었던 체험에 적용시킬 수가 없었고, 나의 길들여진 생각으로 거절하여 왔다. 나는 왕좌에 바보처럼 앉아서 내 생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못한지를 판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에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때에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2천년 전에는 타당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그대로는 되지 않아요. 모든 일들은 변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한 모든 것이 참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라고 말해야 되었다.

      이런 모든 기간 동안에 나는 꾸준히 복음을 선포하여 왔고, 때로는 한번의 집회에서도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앞으로 나오기까지 하였다. 이런 때에 나는 보통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과 함께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를 한다. 나는 이들 젊은이들과 이들이 집에서 읽고 있는 책의 종류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 중의 일부는 음란한 잡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이 나체 여인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책방들에  들어가지 않고 서는 그냥 지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중의 어떤 젊은이들은 그런 책들을 사는데, 그들의 부모들이 모르게 숨겨둔다. 그러면서도 어떤 젊은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다.

     주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이 말씀을 볼 때에 나는 아니야, 그렇지 않지! 라고 속으로 뇌까렸다. 이 세상 사람들이 더 목마르다는 말인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추악한 죄들을 은근히 바라는데, 그들이 공개적으로 범죄하지 못하면 은밀하게 범죄까지 하게 된다.

      어떤 때는 그들이 예수님께 나오면서도 술도 마시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담배, , 섹스 그 외의 세속적인 것들을 갈급하게 갈망하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님들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춤추러 가지 못하고 영화를 보러 가면서 즐겁게 지낼 수 없느냐고 질문한다. 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바르게 키우기 힘들어 하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아마 예수님께서 잘못 말씀하셨다거나 적어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그렇게 잘못 기록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정확하게 쓰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험했던 것은 내가 기록한 것과 달랐던 것을 체험하였다. 이들 젊은이들이 나에게 나아오면, 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면, 그들이 주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도 더러운 것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 고 말씀하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길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 서로 다른 점들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 12:2) 라고 말씀하였다. 나는 성경에서의 많은 이런 말씀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의심하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보았고, 들었던 것과 같은 체험을 했던 것은 믿을 수가 있었다.

     나는 계속하여 또 6년을 설교하여서, 모두 합하여 12년을 복음사역에 헌신하였고, 마침내 나는 마푸물로 (Mapumulo) 에 이르렀다. 나는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하실 때의 첫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다. 내가 "주님! 내가 복음을 선포하게 되면, 나는 교회를 공연장처럼 연출하며 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자신을 돌아볼 때에 "일로야, 네가 지난 12년 동안에 무엇을 하였느냐?"는 자문이 나왔다.

     그리고 보게 되는 이제까지의 모든 세월이 연극을 하듯 연출하며 놀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였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 복음사역에 헌신하였는데 그 사역을 보여 줄 수 있는 성경적인 표준에서 확실한 참 그리스도인들은 12명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1, 5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나는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할 수 없으며, 내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분명히 자기 생활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돈을 잘 벌고, 나는 가난한 선교사요, 때로는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설교를 하면서 오늘 여기에 서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줄루족 교인들을 집합하고 그들에게 "이제 나는 끝났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 문제는 내가 신학적인 이상을 이런 문제들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문제들인 것 같다. 나는 가능하면 보통 이들이 아주 원시적이었고,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이 살아야 할 방법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들이 좀 더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들이 말씀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 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잊어버릴 수 없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어린아이를 가까이 불러 사람들 중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8:17)라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목사는 이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3에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유치한 어린애처럼 되라는 말씀이 아니고, 믿음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소위 말하는 지혜를 버리고 성경을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를 마련하게 하였다. 나는 줄루족 사람들에게 하루에 두 번씩, 아침 7시와 저녁 5시에 성경공부를 참석시키기 위하여 모일 준비를 하라고 요청하였다.

     거기서 나는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 외에 다른 설명을 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롭다고 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성경의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이 진리이시라면, 그것을 알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리고 그 말씀이 역사하시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던 것이 아니며, 그가 말씀하신 말씀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의 실현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따라서 우리 자신들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는 타당하지 않다 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성경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입시다" 라고 제안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나의 제안에 동의하여 주었다.

 

 

 3  성령의 권능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되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6-8)

 

 

      이 때가 우리들이 마프물로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던 1966년도 말에 가까운 때였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케잌에서 맛있는 건포도만 골라 먼저 먹는 것처럼 성경말씀의 여기 저기 골라서 공부하는 형식으로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성장한 다음에는 어린아이들처럼 유치하게 노는 그런 방법에서 자신을 조정할 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구절만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영적인 학교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위한 교단을 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옥이란 곳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교훈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그렇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한 책을 택하여, 그 책의 첫 구절부터 시작하여, 그 말씀을 연구하고, 마지막 절까지 일관성 있게 공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의 일부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전체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줄루족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세 소경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를 원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에 동의하여 차로 그들을 사파리 공원으로 데려갔다.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아주 크고 잘 길들여진 코끼리 앞으로 인도되었고 그 소경들 각자가 한걸음 앞에 나가 그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였다.

      첫 번째 사람은 코끼리 앞에 나아가 큰 다리의 윗 쪽을 부여잡고는 "아하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두 번째 소경은 앞으로 다가가서 코끼리의 엄청난 몸집을 만져보았다. 그의 손이 배를 따라 만지면서 그는 "! 이것이 정말 코끼리인가?" 라고 소리치면서 그는 "그렇지,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라고 말하였다. 세 번째 소경은 코끼리의 머리 가까이에 서서 코끼리의 코를 꼭 붙잡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만져보았다. 결국 이 세 사람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되어 대단히 흥분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사람들이 그들에게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물어봤다. 첫 번째 사람은 그가 이해하고 아는 대로 "내가 설명하지. 코끼리는 큰 나무의 그루터기 같은 것이야" 라고 말하였다. 번째 사람은 "아니야. 무엇을 말하고 있어?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데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 말어. 코끼리는 큰 기구(氣球)같은 것이야" 라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은 사이에 끼어들면서 "어쨌든 당신들은 어디 있었어. 나는 직접 내 손으로 만져보았는데, 코끼리는 큰 호스 파이프 같은 것이야" 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논쟁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코끼리를 "알고" 있었지만 문제가 된 것은 그들 각자가 각기 자기들의 다른 위치에서 코끼리의 일부만 만져보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좋은 비유의 예화로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세 소경들의 이야기처럼 행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소경과 같이 되어 성경에 관하여 많은 일에 소경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에도 정확하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사도행전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언제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였고, 누구나 이런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초대 교회의 기사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행전의 1 1절부터 시작하였고,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시초부터 바르게 하였다.

      사도행전은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셨던 사역들에 대하여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예수님의 사역의 계속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셨을 때에 그것은 다만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죽으심으로 끝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실제로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은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 12:49-50) 라고 말씀하였다.

      그것은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니며, 예수님의 고뇌와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영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지 못하셨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흘리신 땀은 핏덩어리처럼 땅에 떨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결국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그의 충만한 능력으로 그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마침내 불을 붙일 시간이 온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2:13)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4-17)고 대답하였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우리는 지금부터 2천년 전 사람들 보다도 더 말세에 가까운 때에 살고 있는데, 그 성경의 약속이 그때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다면,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아직도 초대 교회 시대와 같은 주기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가 주 예수님께서 그의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시기 까지는 종말이 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말하여 아직도 역사에서의 그 때와 같은 주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벧후 3: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2천 년이란 세월은 바로 엊그제 같은 날이 된다. 우리는 아직도 주간의 중간을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초대 교회에 적용되었던 일들이 똑같이 우리에게도 잘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이 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말한 "나는 물론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물로 세례를 주실 것"( 3:16)이라고 말씀한 그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세례에 대하여 많은 이론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해야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날이나 시간에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에드윈 오르 박사 (Dr. Edwin Orr)가 특별한 사역를 하였던 1952년의 프레토리아 (Pretoria,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에서 열렸던 대 야외집회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화란 개혁파 교회 목사와 침례교 목사를 앞에 나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들이 세례를 베풀 때에 어느 쪽이 물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나는 혼자 속으로 "! 저렇게 교육받으신 분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저런 질문을 해서는 않 되지" 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에 오르 박사는 "보시오. 당신이 누구에게나 세례를 베풀 때에 물을 얼마를 사용하던지 간에 그 사람의 혀는 언제나 매 말라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물세례는 어떤 형식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그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 그러나 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였다( 11:11). 성경역사에서의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이었지만, 주 예수님은 그들도 세례 요한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씀하였다. 소경이 눈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도 그의 이름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주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우리들의 의심할 내용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불리움을 받게 된 것은 세례 요한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3:11)라고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알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용광로에 검은 색의 철을 넣으면 얼마 안 가서 그 색깔이 변한다. 그 쇠가 오래가지 못하여 뜨거운 붉은색이 되었다가 마침내 흰색으로 변한다. 그 뜨거운 불길이 철의 중심을 관통하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 그 성령의 불길이 그 사람의 혀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관통하여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말씀한 대로, 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 하셨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람은 다 비슷함으로 그런 상황에서 아마도 제자들이 도망치는 것이 최선의 길이 되었기 때문에 도망쳤을 것이었다.

      어떤 여인이든지 자기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해주지 못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여자는 도망칠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에서 똑같은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 부모가 아이들에게 너무 엄하게 다스리게 되면, 가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아이들이 가정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고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자주 당신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확증하지 못하면, 자기가 어디에 있어도 자신을 확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주로 사람들에게 "당신이 썩은 감자를 좋은 감자로 가득 채운 주머니 속에 넣으면, 그 썩은 감자가 더 좋아지지 않지만, 좋은 것들이 나빠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것을 그대로 상속하지 못하면 어디서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일할 다음 단계를 계시하실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최선의 일이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한 곳이 아닐까? 예루살렘은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아닌가!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서 죽임을 당할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곳은 누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나쁜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때에 제자들의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반응을 읽을 수가 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말로 따귀를 찰싹 때리는 것처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으라." ( 1:6-8) 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다른 문제들 보다도 먼저 알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예언의 말씀을 듣기에 너무나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다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오늘날 보다도 성령에 대하여 말을 한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성령에 관하여 무지한 때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나는 네덜란드의 한 부흥회 연속 집회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한 설교자는 일어서서 "나는 오늘날까지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부흥회는 시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술 취한 사람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지요. 나는 이런 사실을 나의 경험을 통하여 말하고 실험해 보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계실 때에는 사람의 생애에서나 교회생활에서 가장 정숙한 순간이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사람은 "우리 교회는 당신네 교회 보다도 더 오순절적이오" 라고 말하니까, 다른 사람은 "아니오. 우리 교회가 당신네 교회 보다 더 오순절적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여기에 "우리는 당신들 보다 더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지요" 라는 대답이다. 나는 공연히 우스운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화란에서 실제로 이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감정주의 (emotionalism) 와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사람에게 임하실 때의 결과에 대하여 분명한 특성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받고"( 1:8)라고 하셨다. 이런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하며 주 예수님께서 말씀의 증거가 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

      신약성경에서의 능력이라는 헬라어 원어로는 '뚜나미스' 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다이나마이트를 말하는데, 이 다이나마이트는 강력한 힘을 말한다. 사람이 이런 다이나마이트의 강력한 힘을 모래 같은데 쓰지 않고, 단단한 바위를 부수고 폭파하는데 쓰게 된다. 이와 같이 성령의 권능은 화강암처럼 단단한 바탕과 같은 상황에 쓰이게 된다. 이와 같은 곳이 성령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는 곳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권능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권능에 대하여 말할 때에 먼저 사람들의 느낌에 오는 것은 육체적인 치유를 말한다. 그들은 영혼의 치유가 육체의 치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 사실 사람의 병이 치유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 사실 사람의 병이 치유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천 배나 더 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영적인 일들은 모든 일에 우선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면 증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증인이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증거하는 사람을 말한다.

      헬라어에서 증인이란 말은 '순교자' 를 말한다. 우리는 영어에서도 이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순교자란 자신의 신앙을 버리는 것보다도 죽음을 준비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라는 말씀은 너희는 순교자가 되는 권능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우리는 "당신은 사랑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은 죽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 받는 나라에 살게 될 수도 있고, 믿음으로 순교자로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12:4에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나는 거짓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관계를 맺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나는 훔치기 보다는 오히려 죽을 것이다. 나는 위선자나 겁쟁이가 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나는 주 예수님께 불충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나는 죄를 짓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 가지는 것이 주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였으나, 그가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는 그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증인이 되었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순교까지 하였다. 그가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에 "나는 나의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 머리를 거꾸로 하여 못박아 주시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며, 결국 그는 진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이며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는가?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체험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가 흘리신 땀이 큰 핏방울 같이 되었고, 마침내 그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26:39) 라고 말할 때까지 그는 아주 절망적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이 죽었다.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먼저 우리들의 뜻을 찾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죽는다는 것이 특별히 힘든 일이며,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역사를 찾아 볼 때에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생애에서 어떻게 역사 하였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간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성전 문 앞에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앉아있어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3:6)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베드로의 한 말을 정확히 알아 보아야겠다. 그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였다. 사도 요한은 병 고치는 치유의 은사를 가지지 못하였다. 우리는 요한이 베드로가 가졌던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요한이 단독으로 역사한 치유의 기적을 행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 두 사도들은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요한의 독특한 은사의 본질에 대하여 찾아본다면, 우리는 그가 교회들에서의 설교의 독특한 방법과 가르치는 방법이 형제들 사이에서의 형식적인 사랑과 친교와 연합에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요한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 하였슴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요일 3:6, 8) 라고.

      이 말씀이 우리가 어떻게 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알 수 있게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요한은 사람이 거듭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내는 일은 힘들지 않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것은 누구나 죄를 범하였으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요, 그가 정말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말로서 신학자들이 머리를 짜내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요. 요한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데"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도 요한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 우리들이 그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가 선포한 말씀은 마태복음 3:7-12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가 오늘의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사도 요한은 성령 충만하여 진리를 교훈하였는데,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거짓말을 한다면 그는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성령을 거듭난 체험을 한 사람이 아직도 세상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서 죄를 정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를 정복하고, 이기고 또 이겨서, 병자도 치유하는 데에는 크신 능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들의 판단이 너무나 표면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알 수 없는 몇 마디 말로 말하면 사람들이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간음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성경의 교훈이 무엇과 크게 다른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4  초대 교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奇事)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純全)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讚美)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3-47)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할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이 부셔진다. 우리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빌립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다락방에 모였던 구절을 보게 된다. 그곳에는 여인들도 있었고, 주님의 형제들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곳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계속하여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일은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전에 있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신 일이 그들이 하나되어 기도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이라는 사실을 기적중의 최대의 기적으로 보고 싶다. 역사를 뒤돌아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은 말씀으로 싸우고, 뒤에서 중상모략하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들을 함께 모여 일심으로 기도하게 하여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깊기에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었는가?

      우리는 후에 오순절 날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개종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성령이 보혜사 (保惠師, comforter)로 강림하셨을 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정확히 역사하셨다. 보혜사는 어께를 나란히 해야 할 우리들 사이에 서셔서 우리가 하는 말과 같은 말을 하셨다. 이런 일이 오순절 날에 일어난 것이다. 그곳에 참여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그들의 말로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을지라도 아직도 각기 다른 파장으로 남아 있다. 신학자들의 말, 학생들의 말, 정치가들의 말 등의 각기 다른 말들이 있다. 우리는 외국어를 말하려고 배우고 있지만, 우리 자신들의 하는 말을 잘 모르고 있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성령은 각자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하신다.

      이렇게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교육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또는 이 종족에 속하였거나 저 종족에 속하였든지 상관이 없다. 성령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어린이들까지도 알 수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이것이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일의 문자적인 기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온전한 귀로 말씀을 들어야 하며, 순수한 방법으로 인도받아야 한다.

      언젠가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어떤 유명한 목사가 "이제 다같이 오순절 날에 기도할 때에 모두 방언으로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방언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에 그곳에 모였던 모든 회중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곁에 있었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 중의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오순절의 역사는 달랐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자기 나라 말로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방언의 은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사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야 한다고 편지를 쓴 이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버려야 될 것은 버리고, 함께 지켜야 할 것은 함께 지키라고 권하셨다.

     오순절 날에 3천명의 사람들이 구원의 메시지로 그들의 심령이 뚫려서 회개하였다. 이 사건 이후에 계속되는 일들을 사도행전 2:42에서 읽을 수가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이들은 매일 성령의 일치하게 하시는 역사로 함께 모여 한 마음과 한 심령이 되었다.

     얼마나 크신 기적인가! 청년과 노인들, 남녀 구별 없이 또한 십대 청소년들과 어린이들까지 수 천명의 사람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조직에 속하지 않았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 잘됐어! 우리 교회에서 저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게 되어 기쁘다. 그는 내 마음에 걸려. 우리가 예배 후에 따로 집에 갈 수 있어서 좋아. 더 이상 그와 같이 안 가게 되어서 잘됐어"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신 역사로 날마다 경건한 사귐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역을 시작할 때에 마푸물로 (Mapumulo) 라는 작은 마을에는 약 40명 가량의 그리스도인들만 있었는데, 그나마 그들 중에서 알력과 싸움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끔 화해시키는 자가 되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조언해 주는 사람에게 가서 문제를 진정시키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잘못을 털어놓는 일을 하고 다녔다. 그들 자신의 죄들을 신중하게 숨겨야 했는데, 그런 결과로 두 얼굴의 위선적인 기독교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도행전 4:31에서 초대 교회에 대하여 읽으면, 그들이 기도할 때에 땅이 흔들려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고 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이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역사가 일어났고, 이런 기도는 세상을 진동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기도 집회와 기도하는 그룹들이 있는가? 그런데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사람들 보다도 더 진동시켰는가?

      우리는 기도했지만 세상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움직였다. 누구나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혼돈케 만들고, 우리의 교회들이 우리를 혼란케 만들고, 우리는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의 교회까지도 서로 대립되는 짝들이 같이 살면서도 그들은 교회 회원으로 남아 있다.

1966 년에 우리는 초대 교회의 첫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고 우리들끼리 "그 교회는 우리들에게서 너무 먼데 떨어져 있다. 2천 년이란 세월보다도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 만큼이나 될 것이다.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그 교회를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와 비교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가장 청순하다고 믿고 있을지라도, 모든 일들이 빛으로 드러나게 될 때 말이다" 라고 말해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취미나 주말의 어떤 일을 한다는 인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생명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매일 주님을 위하여 살아왔다. 그들이 함께 모일 때나 흩어져 있을 때나 그들의 생활은 동일하였다. 그들의 삶의 모든 날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전부가 되셨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물이나 밭을 팔아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함께 모였고, 공산주의자들이 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였다. 누구나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이기주의적인 자아중심이 아니었고, 그들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주 예수님만 위하여 살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았고, 그들의 이웃을 위하여 살았다. 이것이 우리가 이들 첫 그리스도인들을 연구할 때에 보아왔던 정확한 현실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에서 전혀 놀라운 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잠도 자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노리는 마귀가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이 말씀은 마귀는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에게 어떤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임으로 우리는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오지 못하도록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거듭난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하얀 거짓말"이라는 명목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마귀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간다. 이런 일이 바로 아나니아에게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한 일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들도 교회에 헌신하게 위하여서일 것이다. 단지 성경은 그들 내외가 자기들의 재산을 팔기로 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공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이 부부가 이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훌륭한 모방자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르면서도 모방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흩어졌다"고 증언하였다. 사실 우리는 양과 같아서, 한 양은 다른 양을 뒤따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에게 "우리는 지혜롭게 하자"고 다짐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팔았다. 아마 그들은 교회의 헌금을 위하여 재산을 처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어떻든 그들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가져가지 말아야지. 우리들이 일부는 보관하고 있어야지. 우리는 이것이 우리들의 모두라는 핑계로 일부는 우리가 보관해야지" 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한 동기는 잘 알 수가 없다. 혹시 그들은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들이 침실에서 일부만 사도들에게 바치기로 서로 동의하고, 그 나머지는 보관하여 지키기로 생각한 것 같다.

     아나니아는 자기의 재산을 판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가서 그들의 발앞에 바쳤다. 사도 베드로는 진리의 성령 충만한 사람임으로, 성령께서 그에게 "베드로야, 여기에 무엇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어, 무엇인가 잘못 되었어" 라고 말씀하였을 것이다. 이런 영감으로 즉시 그에게 "아나니아야, 말해 보라. 이것이 네 땅을 팔았던 땅값이냐?"고 물었고, 아나니아는 ""라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를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3-4) 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들었을 때에 엎드러져서 죽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교회는 하얀 거짓말 일지라도 죄와는 타협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죄를 수용할 공간과 시간이 없었고, 이것을 가장 심각하게 다루었다. 이런 경위로 그 사람은 거짓말한 죄 때문에 죽었다. 이런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교회요, 그리스도 교회의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다.

     나는 가끔 내 자신에게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볼 때에, 오늘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바르게 부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죄로 취급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런 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크게 다루어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 이런 일에 대하여 초대 교회와 성령께서는 "교회에서 거짓말하면서 사는 것 보다도, 무덤 속의 죽어있는 자가 더 낫다"고 말하고 계신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도 우리들의 생활에서 죄와 타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는 우리교회 교인이요, 우리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어요" 라고 말한다. 심판 날에 그 사람은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 되지 못하면 남아있는 그루터기처럼 불에 타버리게 된다. 사람은 단순하게 교회 조직체에 속할 수는 없지만, 그는 순수하게 거듭나야 되고, 그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그의 생활에서 열매가 있어야 한다.

      다시 사도행전 5장에 돌아가 보자. 약 세 시간 후에 아나니아의 아내인 삽비라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들어왔다. 우리는 이때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로서 전화나 자동차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분명한 것은 죽은 자의 아내가 그 죽은 남편의 장례를 준비했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몇 사람의 청년들이 그를 메고나가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이제 그의 아내가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그곳에 들어왔다. 그녀와 마주친 사도 베드로는 "삽비라야, 아나니아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고 물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입장을 지켜야 했다. 그들은 그들이 이미 어떻게 하기로 합의 하였슴으로, 삽비라는 남편에게 충성스러운 자세를 취하면서 대답하였다.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는 "예 이것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에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은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내 가리라"고 책망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삽비라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죽었다.

      1966 년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초대 교회와 같은 교회의 교인들이 되기를 원하였었다. 쉽게 하얀 거짓말을 하고 작은 죄들을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날에는 그런 교회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내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던 것도 감사하였다.

      그것은 내가 그 사람들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아십시오. 그곳은 대단히 위험한 곳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무서운 곳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해요. 누구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괴로운 일이지요. 그는 그녀에게 어떤 기회도 허락하지 않았지요, 왜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일을 행하였을까? 왜 그녀에게 가서 그녀를 미리 경고하지 않았을까?" 라고 말했어야지.

      아마 오늘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시대에 그곳에 살지 않았던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 충만했어야 하지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에 당신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면,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오. 이 초대 교회에서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이 모든 초대교회 회원들에게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일들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작은 줄루족 교회의 회중들에게 "만일에 내가 당시의 베드로였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요? 만일에 당신들이 베드로였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였을까요." 라고 물었다. 우리가 성경에서 생긴 문제가 너무나 표면적인 것으로 그것에 있었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초대 교회와 같은 교회가 오늘날에 여기에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우리는 그들이 사랑도 없고 은혜도 받지 못한 너무 과격한 광신자들로서 그 사람들을 추방했거나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에 내가 베드로였고 아나니아가 나에게 나왔으면, 나는 그를 끌어 않고 형제적인 키스로 인사를 교환하고 "형제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요" 라고 말하고, 그가 하얀 거짓말을 했었거나 말았거나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가 헌금하기 위하여 가져온 그 풍성한 헌금을 쳐다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야" 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함께 모여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재정적인 대가를 잘 알고 있다. 나 같으면 그를 열렬히 영접하고 "형제여!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다음 직원회에서 나는 당신이 교회의 집사로서 임명해 줄 것을 제안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사실은 교회에서는 돈을 가지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르게 반응하였다. 누구나 그가 말한 것이 "너는 너의 그 돈과 함께 지옥으로 가라.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부활하신 주님의 교회에서 용납할 수가 없다. 우리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타협하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며 절반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된다고 본다. 그것은 교회에서 그렇게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구더기를 먹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바로 그것이 당시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다루었던 방법으로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성경 공부의 영역을 그렇게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도행전 제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것으로 돌아가 공부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3:4, 6)고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조심스럽게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먼저 그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실수를 할 수 있었을까? 어느 신학자라도 자기 자신을 이런 방법으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예수님을 보시오, 하나님을 보시오, 성경을 보시오, 우리는 보지 마시오"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가 이런 실수한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우리들과 같이 훌륭한 교수들과 교사들이 가르치는 신학교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에 대한 이런 평가를 충실하게 하여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최고의 교수와 교사에게서 배웠으며, 최고의 스승이신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배웠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이제 방금 성령 충만한 체험을 한 사람이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가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말인가?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게 되면 고린도후서 3:3에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쓴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미 2절에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있는 바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제 베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손이 사도들의 생활에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역사하고 계셨다. 이런 사실이 왜 그들이 부끄럼 없이 "우리를 보라"고 선언할 수 있게 하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베드로가 그의 치유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권위로 "우리를 보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전에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들의 자녀들을 책망할 때에 "우리를 보고, 우리들의 살아온 생활을 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위한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우리가 우리 집에서 일하는 파출부나 정원사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 전에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했던 것처럼 하지 말고, 내가 말 한대로 하시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꼭 바리세인들이 한 것과 같은 일이다. 마태복음 23:3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였다. 바리세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을 자기들은 실천치 아니하였다. 이런 것이 바리세인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이기도 하다.

       20 세기와 오늘의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정확하게 똑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지만 그들 자신들은 실천하지 않고 있다. 나는 진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가끔 바리세인들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사람들에게 우스운 이야기를 할 때에 "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살펴보고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례를 보여주기 위하여 어떤 유명한 목사의 이야기를 하고저 한다. 이 유명한 부흥사는 너무나 많은 집회 초청을 받아서 그 초청받은 모든 곳에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집회여행 중의 한번은 큰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요청을 받았고,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동행해 오기로 초청을 받았다. 교회를 대표하는 두 부인들이 그의 부인을 안내하여 교회에 들어갔다.

      그 때에 그 목사님은 강대에 올라섰다. 그는 훌륭한 설교가로서 누구나 그의 설교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가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는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정숙하였다. 그의 표현의 양식은 완벽하였고, 같은 말이나 표현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설교가 끝났을 때에 청중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이 때에 세 여인도 교회를 떠나면서, 그 중의 한 여인이 그 목사 부인에게 ", 저렇게 훌륭하게 설교하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그 목사의 부인은 대꾸하여 ", 당신은 그가 집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몰라요!" 라고 말하였다. 만약에 우리들의 생활이 자신의 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는 어떠하며, 마귀에게 어떠하겠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적용하는 사람이나, 그런 일에 직접 해당된 사람들은 그들의 바리새 주의를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1966년에 "우리를 보라"고 세계 사람들 앞이나 이방인인 줄루족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의 입을 열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한 번 더 듣기로 하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우리는 베드로에게 다시 물어보자. "베드로여,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주님을 부인하여 너무나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지금은 당신은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는 "형제여, , 그렇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지만 나는 회개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주님께 울부짖었고, 나는 주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을 때에 그는 우리의 죄를 잊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나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믿는 복음이다; 우리는 이미 해결된 과거 때문에 과거에 묻혀 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정말로 순수하게 회개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으면, 우리들의 죄의 용서받음을 통하여,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살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였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돈이 없다는 경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세계 정상에 섰을 때에, 우리가 많은 돈을 벌었을 때에, 모든 일들이 잘되어 금과 같이 반짝일 때에 우리는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그럴 때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어 갈 때에나, 파산되고, 운이 다하였을 때에도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너무나 솔직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였거나, 아니면 그 구걸하는 사람에게 요술을 부려서 얼마의 돈을 주려고 하였겠는가? 우리는 이런 방법을 잘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주머니에 돈이 잔뜩 있으면서도 "미안하네, 지금은 네게 줄 돈이 한 푼도 없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베드로가 바른 말을 하였다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가 자기들에게 돈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여서 그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나의 적은 줄루족 교인들에게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는 큰 성당에서 봉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사제는 헌금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헌금접시를 사용하지 않고, 이 헌금하는 일을 위하여 출입문 가까이에 큰 책상을 놓아두었다. 교인들이 돌아간 다음에 그 책상에는 교인들이 헌금한 금과 은으로 된 많은 돈들이 있었다.

      이 나이 많은 사제는 그의 곁에서 도와주는 젊은 부사제와 함께 이 헌금한 돈들을 세면서, "여보게 젊은이,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오늘의 교황도 그럴 것이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 말에 응답하여 그 젊은이는 "그러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고도 말을 못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 책상들이 뒤집혀진 것을 알고 있다. 한때 그들이 소유했던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한다. 어디서나 우리가 가졌던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소유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돈은 우리가 주님의 사역에 헌신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도 그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으며, 우리들의 사역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 우리는 조금은 가롯 유다를 닮은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돈이 없는 것이 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 큰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았다.

      이 때에 갑자기 바로 3개월 전에 개종했던 줄루족의 젊은 여인이 일어났다. 그 여인은 눈물을 냇물처럼 흘러 내리면서 "! 므픈디시 (목사님), 제발 그만" 이라고 소리질렀다. 이 여인은 나의 말하는 중간에 방해하였다. 놀라서 나는 "무슨 일이요?" 라고 물었다. 그 여인은 "내가 기도하여도 좋겠습니까?" 라고 응답하였다. 나는 이런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이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새로 믿기 시작한 한 사람이 갑자기 일어서서 예배를 중단시키고 기도하기를 원했다. 나는 이런 일을 허락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 젊은이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그녀는 교회의 집사나 장로도 아니었다. 이 여인이 기도나 할 수 있을까? 그녀가 혹시라도 기도를 잘못하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그때에 나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렇다. 이 여인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었어." 그리하여 나는 "좋소, 당신이 기도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이 젊은 여인은 아주 단순한 기도를 하였다. "오 주 예수님! 우리는 초대 교회가 어떻게 하였는지를 잘 들었습니다. 당신이 강림하실 수 없습니까? 당신이 2천년 전에 강립하셨던 것처럼 지금 강림하셔서 우리 가운데에 거하실 수 없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될 수 없겠습니까?" 라고 기도하였다.

      이 순간에 내 심령 속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경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생각하였는데,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그들에게 말씀한 일이었다. 그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뗄 때에 그들의 눈이 열려서 한 제자가 다른 제자에게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24:32) 고 말하였다.

       나는 "그때에 그들이 느끼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 주님! 오늘의 세계에서 당신의 자녀들과 교회가 초대 교회와 같게 되기를 하락하옵소서. 당신은 다시 한번 이런 역사를 할 수 없을까요? , 하나님! 당신의 역사를 부흥시켜 주옵소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될 수 없겠습니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가 예배를 마쳤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우리가 예배를 보았던 부락에 사는 내 형님을 불러서, 그에게 "아시는 대로 오늘 교회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가 갑자기 테러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도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습니다. 만일에 그 기도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도였고, 내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한,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우리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체험하였던 일을 다시 체험하게 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후 일주일 반 후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셨다.

 

 

 

5   죄의 깨달음과 부흥의 시작

 

"원컨데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도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가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 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1-4)

 

 

      이 말씀이 정말로 부흥을 기다리는 순수한 기도였다. 1966년에 우리는 영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떨어져 있어서 "오 하나님! 당신이 하늘을 가르시기만 한다면 ……" 이라고 기도하였다.

      선지자는 "주여, 우리는 당신이 강림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된다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얼마나 많을지라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따르겠나이다" 라고 말하신다. 내가 부흥에 대하여 말할 때에 부흥집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가르고 우리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흥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씩 모였고, 얼마 후에는 우리가 깊은 회개운동에 들어가게 되어 우리들의 성경공부가 그 시대의 배경으로 돌아가, 우리는 바로 깨어지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 중에 오셔서 역사하시게 되기까지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 거리에 왕래하는 밖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베드로전서 4:17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로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개종하지 못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38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시냇물이나 개울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강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은 시냇물일지라도 폭우가 쏟아지면 강물이 둑을 넘치게 만든다.

     우리는 강에서 흐르는 물로 사막을 푸른 동산으로 만들 수 있고, 관개사업으로 밭을 만들 수 있고, 전기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단순히 물이 흐르는 강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생수의 강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작은 마을 마프물로에서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 넘쳐나고 있는가?"라고 자문하여 보면, 우리는 "그렇지 못해요"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강물이 넘쳐날 때에는 어떨까요? 이렇게 넘쳐나는 강물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물을 저장하는 땜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땜의 벽이 아주 견고하여 물이 넘쳐날 수 없도록 건설하지 않으면, 엄청난 양의 물이 그 땜을 붕괴시키고 만다. 땜이 파열되어 붕괴될 때에 사람은 이런 물의 격류 하는 파괴력을 알게 된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 말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생수의 강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이 작은 교회에서 "당신들 중의 누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보통 때는 하지 않았던 일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당신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손을 들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물론 손을 들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보시오, 우리는 정면으로 부닥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말씀한 대로 그를 믿으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들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당신의 생명 속에 생수의 강이 넘쳐나고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모두 "아니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당신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라고 다시 물었을 때에 그들은 "어쨌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였고,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거나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참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 모든 논의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갈 방향을 상실하였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주님께서 무엇인가 나에게 보여준다면 무엇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서 말씀한 것처럼 ……" 다시 말하면 아마도 성경은 믿는 자의 생활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것을 말씀하였을 것이고, 우리들의 생명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것만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는 성경을 살펴서,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말씀하게 하자. 우리는 우리가 읽는 말씀을 왜곡하거나 돌려 해석하지 말고, 떼어버리지 말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비쳐보게 하였다. 우리는 우리들의 방법과 관습이나, 교회의 법이나 우리들의 개인적인 종교적인 의견들을 무시하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들어야 하였다. 우리는 진정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것을 믿고 있는가?" 라고 다짐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서 제일 큰 죄인에게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의 목사, 바로 나였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였고, 나무랐고, 모든 일에 변명을 하였다. 교인들이 나에게 왜 모든 일을 힘들게 하느냐고 물을 때에, 나는 "당신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지요 라고 말한다. 오늘날 백인이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흑인인 줄루족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백인들의 종교라고 말하며, 더욱이 백인이 설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특정한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대단히 정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젊은이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무엇을 하느라고 바쁘며, 모든 그들의 시간을 어디다 소비하고 있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 섹스, 축구, 디스코텍, 포르노 사진, TV 등이지요. 그러면 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지 알 수 있으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데, 당신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무슨 일이 있겠는가? 당신에게 세 손가락으로 지적하지 말 것은, 그것은 마치 당신이 비판하는 사람보다 세배나 더 나쁘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된다.

      나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리고 심리적인 현상으로 말하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아낸다. 당신이 어떤 사람의 약점을 알려고 하면,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듣기만 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그런 일들이 그들 자신의 생활에서 찾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화가가 나무를 보게 되면 아름다운 그림의 주제를 찾는다. 목수는 그 나무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것으로 멋을 낼 수 있는 훌륭한 판자를 생각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또 다른 이익을 생각한다.

     알콜 중독자를 생각해 보자. 그는 언제나 술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다른 사람이 병을 팔장 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곧바로 "! 저 사람이 술을 샀구나. 그는 나같이 술고래처럼 마실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병에는 물만 담겨 있는데도 말이다. 동성연애자는 두 사람이 함께 거리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 "저들도 아마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생활의 어떤 일로서 그의 손가락으로 지적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느 토요일 날 아침에 몇 사람의 흑인들이 와서 그날 오후 1시에 우리가 함께 갈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들은 그 한 주간 동안 집에 있지 못했고, 어떤 사람들은 집에 가려고 7km나 걸어야 했다. 그들은 주말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야 자기들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고, 세탁과 집안 일들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과 정오에 만나기로 동의하였다.

     우리는 그때 전에 우사로 썼던 작은 건물 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 길 건너편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약속한 시간에 그곳에 함께 모였다. 그때 마푸물로의 행정장관, 부행정장관, 우체국장, 경찰서 경장 등 그 작은 도시의 쟁쟁한 사람들이 테니스 시합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 때 나는 ", 큰 일 났네. 이제 내가 이들 흑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다면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지방의 고관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지만 우리가 하는 대로 기도하게 되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백인들은 나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겠지만, 나는 그 순간에 우리가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보았다.

     우리는 얼마 안 가서 내기하는 사람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딜레마에 빠졌다. 그렇다고 내가 흑인들에게 ",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이 경기가 끝난 다음에 돌아옵시다. 5시에 돌아옵시다" 라고 말을 했어야 했겠는가. 내가 무슨 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내가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되풀이하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을 들었다; 저 사람들이 내가 이들 흑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백인인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 때 갑자기 나는 번득이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서서 창문들을 닫았음으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창문들은 구식이어서 위로 올려서 닫아야 했다. 내가 그 문을 닫을 때에 "그러면 됐다. 문을 닫아라. 그러면 너는 안에 있고, 나는 밖에 남아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런 말을 특별히 통역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곧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밖에 두신다는 창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의 교만한 마음이었던 것을 알았다. 나는 전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성령에 대하여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설교하였지만 성령이라는 말속의 거룩하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제까지 성령의 거룩하심의 참뜻을 알지를 못했다는 말씀이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는 특별히 오순절파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가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하였다. 우리는 말하기를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나는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지만 우리의 하는 말이나 행동은 대단히 조심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성령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거친 말로 욕을 하고 저주를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여인들과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 이것은 내가 하는 방법인데 나는 "이리 와서 나와 함께 강단에 올라섭시다. 그리고 당신이 성령 충만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신이 말한 것을 시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은 내 자신이 성령이 어떤 분이 시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나는 특별히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말로서 많은 것을 고백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많은 말들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손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와 케이프 주 (Cape Province) 의 화란개혁교회

(Dutch Reformed Church) 를 축복하여 그 지역에서 능력 있는 역사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 머레이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치는가에 따라 측량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많은 반대에 부딪치지 않게 되면 하나님께서 많이 역사하지 않으셨다고 보는 의견이다.

      머레이 박사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앤드류 머레이는 잘못된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너무 과격하고 괴벽스럽게 가르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누구나 그가 설교하는 대로 살 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선택하여 머레이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두 주간을 지내게 하였다.

     그 두 사람이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친구들이여, 그는 그가 생활하는 것의 절반도 설교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실제로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이 사는 것과 행동을 보면 당신들은 '그들은 설교할 뿐만 아니라 그 말대로 살고 있다'고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궁전에 이르렀을 때, 그 여왕은 자기가 보았던 것의 절반도 말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하는 것을 조심하여야 한다. 보통 우리는 우리가 실행하는 것보다도 더 말하려고 하고, 실제적인 값보다 더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사역에 이미 큰 손상을 받고 있고, 하나님 사역에 최대의 손상을 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불경건하여서 보다도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미지근한 현실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 3:15-16에서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미지근한 그리스인들 보다도 오히려 불경건하고 거친 이방인들을 더 찬 것들로 분명히 가르칠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을 토하여 내치신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종말은 이반인들 보다 더 악화될 것을 경고하여 주셨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의 교만을 알게 하시고 지적하신 일이다. 사실 교만은 무서운 것이며, 무서운 죄이기도 하다. 나는 되풀이하여 나의 내적인 안목으로 사도의 말씀을 살펴보았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 하신다" (벧전 5:5) 고 증거 하셨다. 나는 이런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주는 것은 사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가 깨달은 것은 교만한 나를 어렵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내 속에서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가 교만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만을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테러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밤에 문이나 창문을 꼭 잠그고서야 잠잘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들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를 구원하셨던 가장 엄위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전 10:4). 우리는 그 다음 구절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손이 그의 백성을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광야에서 멸망시켰다. 그런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에게 향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보다 더 두려워할 분이 없다. 전 세계가 우리를 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면 그건 벌써 지는 싸움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사람일지라도 세계를 극복하고 승리하며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에 "……면"(if)이라는 작은 가정의 말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으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단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사인 가정으로 만약에 (if) 라는 "……면"이 들어 있으면 우리들은 그 뜻을 회피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먼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가를 의심하여 보아야 한다.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교만한 생각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신다는 것이다. 사실은 나의 생활도 그러하였다. 내가 이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울부짖으면서 "오 주님! 언제나 마귀가 나에게 대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주님이 나를 대적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단지 마귀의 역사라면 내가 그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데, 당신의 나의 잘못을 대적하고 계신다면 나는 멸망 받을 것입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방앗간에서 갈아버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나의 발로부터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고, 먼저 그의 손으로 나를 던지고, 그의 손가락으로 나의 가장 아픈 곳인 교만을 눌러 버리신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아시면 그 사람, 그의 하는 일, 그 장소를 대적하신다. 그는 실수 없이 분명하게 교만을 대적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성령께서는 나에게 또 다른 죄를 알게 하셨다. 그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요한복음 16:7에서 읽은 대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방법으로 쓰여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보혜사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읽었다. 그리고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의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고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보혜사의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셨음으로, 우리는 보혜사 (Comforter, 위로자) 가 오시면 우리가 위로받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보혜사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그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고 불안하게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떤 목사가 나에게 "말해 보시오, 당신이 설교할 때에 죄에 대하여 설교하십니까?" 라고 물어왔다. 나는 "미안합니다. 나의 경험으로는 내가 다른 것으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그는 "그래요. 나는 죄에 대하여 설교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이 죄의 문제에 대하여 설교하게 되면, 교인들이 불안하여 안절 부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가 이 땅에 오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여 주실 목적으로 오셨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이름의 의미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1:21)라는 뜻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그는 무엇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죄를 십자가에 달리시고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셨고, 우리를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을 떠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것은 그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지상에서의 천국이였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예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시고, 그를 보고, 그에게 듣게 되고, 당신들의 모든 문제들을 그분과 논의할 수 있는 모든 좋은 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일이 있는데 내가 가야 한다거나 보혜사가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오실 때에는 세상의 죄를 정죄하신다. 그때에 우리는 신속히 "물론 그가 세상의 죄를 정죄하실 것이지, 그렇지 세상을 정죄하셔야지, 그러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정치가들과 그들의 표리가 다른 이중적인 말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이 그들보다 더하지 않을까라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이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정죄하실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때에 어딘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씀이 어디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정확히 말씀한 것이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정죄할 곳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게 될 때에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서 말씀한 대로이다.

      성령께서 먼저 사람으로 찬양하게 하고 경배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말 앞에서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이 돌리다가 뒤엎게 만드는 일과 같다. 사람들은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어 놓은 것이 된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임하게 되면 먼저 하는 일은 사람의 죄를 책망하시는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상한 심령이 되어 눈물 흘리게 된다. 그들의 얼굴은 시큰둥해지고 행복하지 않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미소 짓게 되는 것보다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

      회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경우에 따라 순수치 못한 것이 있다. 개종자는 성령의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죄의 책망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함께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면 잘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그는 우리의 눈을 죄에 대하여 알게 하시고, 이 일은 어쨌든 기쁨을 주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어서 우리들의 죄를 씻어버리게 할 수 있는 십자가로 가게 만든다. 그러면 즐거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속죄의 의미를 모르고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더 깊은 확신을 가지면 "많이 용서받는 사람은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더 크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경건한 슬픔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은 생명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르며, 그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그들은 거룩함과 의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또 한 가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혀 다른 경험이 있다. 하루는 집회에 갔는데 이미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여 내가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때 당황하여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내가 옷과 넥타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셔츠가 가슴이 열린채 손에 성경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무엇라고 말할 것인가? 그들은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 때에 나는 갑자기 선지자 엘리야가 경건치 못한 아합 왕과 분명히 왕을 좌지우지하는 경건치 못한 왕후 이세벨 앞에 섰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왕후는 부도덕하게 살아온 여인이며, 분명히 사치한 옷을 입었을 것이며, 아마 화장을 잘하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종말은 들개들에게 먹임을 당하게 되었다(왕상 21:23).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경건한 여인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온 세상에 한번에 보여주셨다.

      예언자 엘리야가 이 아합 왕 앞에 섰을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 살아계시니, 내가 여기에 섰습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우리가 왕이나 대통령이나 수상 앞에 서본 일이 있는가? 그때 우리가 어떤 느낌이 있을까?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원수로 알고 있는 왕 앞에 나타나야 했다. 엘리야는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악행을 할 수 있는 폭군 앞에 섰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 살아계시니, 내가 여기 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세속적인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하였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랐다. 어떻게 보면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한 일에 대하여 모두 그대로 따르지 못했지만, 이들은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관심이 있었다. 내가 교인들 앞에 설 때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서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내 심장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선지자 엘리야를 사랑한다. 그리고 얼굴을 그들의 무릎 사이에 묻고 기도하여 어떤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되기를 원한다. 엘리야는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비가 오게 되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자연계도 지배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의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다시 기도하였다. 일곱 번을 그렇게 하였을 때 그의 사환이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 나나이다"(왕상 18:44) 라고 고하였다.

      마침내 선지자 엘리야가 기도한 대로 비가 내렸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게까지 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왕상 18:38). 나는 이런 분을 사랑하였고, 내 마음 중심으로부터 "나는 이와 같은 분이 되렵니다" 라고 울부짖는 기도를 하였다. 우리는 야고보서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5:17)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분명히 그는 햇빛에 반짝이고, 터져나가는 비누방울과 같지 않고, 경건한 권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기도하였고, 그 터가 흔들렸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오늘날보다 더 기도가 필요한 때가 언제 있었겠는가? 어디서나 기도회의 모임이 있지만, 그 많은 기도 모임에도 불구하고 그 터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 터가 우리를 흔들고 있다. 이 세상 터가 기독교를 흔들었고, 움직이고 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게 된다. 이럴 때에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일을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엘리야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만약에 내가 천둥 번개 치는 벼락을 맞게 된다면 "오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0)는 말씀이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에 줄루족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여 왔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여 왔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평가해 봐야 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27에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한 것을 알고 있는데 거기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 말씀하였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모든 세월 동안에 설교하여 왔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거절되고 버림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일들이 나로 하여금 내적인 파멸을 겪게 하였다.

      그 때에 나는 갑자기 환상같은 그림을 보았다. 나는 환상이나 꿈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이 그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만일에 화가였다면 나는 오늘도 그것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신들과 우상들을 모셔놓은 힌두교의 사원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이 이교도들의 사원에 들어가서 첫 번째 우상에게 땅에 머리를 숙여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다음 우상에게 가서 내 앞 이마를 마루에 대고 그 우상을 예배하였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세 번째 우상에게 똑같이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큰 소리를 치면서 정신 차리고 "주여 나는 지난 12년 동안에 줄루족 사람들에게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라고 설교하여 와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목사인 내가 우상들에게 머리 숙여 그것들에 예배를 드리다니! ……" 라고 울부짖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내가 예배를 주관해야 할 강단에 나갔지만 나는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 많이 노력하였지만 겨우 말을 더듬기만 하였다. "우리 무릎을 꿇고 기도합시다." 나는 끊임없이 울면서 울부짖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이 부흥의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방앗간에 집어 넣어서 천천히 갈기 시작하였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방앗간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의미를 알지 못 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난 12년 동안 복음을 설교하였다는 것도 잊어먹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였다는 것이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성전에서 죄인이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하였다.

 그때가 부흥의 역사가 터지기 시작한 성탄절 때였다. 우리 가족은 오형제와 한 자매였고, 성탄절 때에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때였다. 오래 전에는 성탄절에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찬송들을 함께 합창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는 일들이 모두 다 달라졌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모든 것들을 잊어먹었다. 성탄절 나무를 장식하는 일이나, 즐거운 성탄절 기분이나, 크리스마스 캐롤도 없었다. 교인 한 사람이 와서 나에게 "형제여,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것을 모릅니까?" 라고 물어왔다. 그리고 나는 예배에서 전혀 다른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쁘게 역사하셨다.

     나는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었다. 주님께서 내 코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나의 정장 옷깃으로 에워싸서 나는 볼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내가 예배 드리러 나가는데 갑자가 내가 면도를 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면도도 안하고 다니고 있지만, 우리들이 자랄 때에는 면도도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큰 결례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자라왔다. 그때에 내가 교회 앞에 면도를 하지 않고 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나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크게 얻어맞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6:14)는 말씀이다. 나는 "주 예수님, '당신은 성경에 말씀한 대로 나를 믿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처럼 세상에 대하여 못을 박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에 따라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어야 했습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흥의 시기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말씀이 우리를 강타하였고, 우리의 심령들을 꿰뚫었다. 그것은 마치 오리가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것과 같지 않았으며, 바위가 강 밑에 있을지라도 그 속이 젖어있지 않은 것과는 같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큰 망치와 같이 바위를 조각 내어 부셔버린 것이다. 이제는 나에게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되었는데 부흥의 역사 도상에 서있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만 "주님,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단 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라고 울부짖을 수가 있었다.

      후에 한 가지 더 다른 것을 나에게 계시로 깨닫게 한 것이 있다. 하루는 내가 야생 무화과나무 밑에 서 있었고 몇 사람의 아프리카 사람들도 그 가까이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저 친구 술 취했나, 그런데도 나쁜 친구처럼 보이지 않네" 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 사람들은 내가 경멸하였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교만을 쳐서 내가 경멸을 받게 되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나에게 기억나게 한 것 중의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상이였던 벨워드 박사 (Dr. Verwoerd, Prime Minister)가 원주민들의 연합회인 반투tm (Bantus) 에서 당시의 철저한 인종차별정책 (Apartheid) 의 환경 속에서도 백인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들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때에 나는 내 스스로가 "그렇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실행하는 것 보다는 싶지요" 라고 중얼거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고인이 된 수상이 말한 이 말들을 사용하셔서 나에게 "엘로야, 이 말씀은 벨워드 박사의 말이 아니라, 왕중의 왕이 너에게 한 말씀이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느냐?"

     나는 이들 줄루족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주님께 ", 나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결국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들을 내 자신 만큼은 사랑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서 "네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한다면, 그 역사는 내 말로 이루어질 것이고, 너는 성경에 말씀한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너는 이 주루족 사람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였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말은 "주님,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멈추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것은 가장 낮아지는 것이다. 첫째가 꼴찌요, 가장 위대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 하나님, 아닙니다.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주님 나는 더 이상 이 길을 더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 내가 내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은 흑인이 옷 가방을 들고 가는데 내가 그에게 가서 '내가 당신의 옷 가방을 들고 갈까요' 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합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나의 심령 속에서의 싸움 때문에 밤에는 벌떡 일어나게 되고 침대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흥정하고 "주님! 차라리 나를 한적한 섬 같은 다른 곳으로나 다른 나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이 남아프리카에서 나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내 가족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리고 내 부모는, 내 형제는요? 주님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당신은 내가 제일 비참한 '최하'의 종이 되어지기는 기대하지 마십시요. 내 백성들을 생각할 때에 백인들에게는 할 수 있지만, 줄루족에게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면 좋다. 나는 너에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는 나에게 부흥의 역사를 기도한 사람이 아니더냐. 너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역사하기를 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내가 올 때에, 왕으로 올 때에 내가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비틀고 돌려보면서 주님께 저항하여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주님은 나에게 더 압력을 가하셨고, 허리띠를 조이시고 "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25:40)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날에 세상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을 세우시고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하였는지에 따라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계산해 보신다. 이것이 우리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저의, 가장 밑바닥의 사람을 세우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따라 우리들의 사랑을 측정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에게 했던 것보다도 조금이라도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이것이 심판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방법이 되신다. 그 최후의 심판은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날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충격을 지금 받게 되기를 원하실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를 다시 확실하게 되돌아보기 위하여 어떤 충격을 받는 것도 좋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네가 이 형제중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만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위대한 사람이나 가장 영향력이 많은 사람을 대하였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 중에서 가장 낮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여러분들이 이제 내가 내 심령 중심이 흔들렸고, 하나님께서 나를 맷돌에 밀어 넣으셨다는 느낌을 가졌다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소? 이것은 참혹한 전쟁이어서 나는 하나님께 ", 주님,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음으로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의 가치를 상실 하였습니다" 라고 간구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내 심령에 분명히 들려왔는데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 10:39)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살기 위하여 싸우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힘들게 살게 하신다.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도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또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심으면 백배나 수확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심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하는 것이 되고, 백배나 어려웠던 것이, 백배나 더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제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쉬울 수가 있지만, 그는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드신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를 우리들의 구주로 삼을 때까지의 말이지만, 그러나 이런 말이 뜻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주님에 대하여 입술로 말로만 주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주님으로 삼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그의 말씀에 따라 사는 우리들의 생활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주님, 나는 더 이상 이런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일로야, 너는 나의 부흥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는 이 길을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좋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하라. 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에게 와 달라고 기도하였다. 이제 내가 가마.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지만, 밖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할 것이다" 라고 응답하셨다.

      이제 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그런 역사가 적게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운동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말장난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그를 대적하고, 그들이 기도하였던 것의 적이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겪고 있는 체험을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저항하게 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가끔 간통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며 살면서도 너무나 음탕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유들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심판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주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내 심령 속에서 청결케 해주었으며, 나는 그 모든 것을 헤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하나님과 계약하여 우리들의 생각과 개념에 따라 우리들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학생이냐? 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역사하신다. 너는 너의 어떤 생활양식으로서는 '나는 주시다' 라고 말하는 나의 임재를 기대하지 않고, 네가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기까지는 너는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조언자가 필요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것은 나에게는 큰 장애물이였고, 나는 마침내 내가 "좋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기까지 불 같은 갈등이 일어났다. 그 다음 문제는 내가 두려워한 것은 손에서 뺏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으로서 그가 역사하시는 동안에 손에서 뺏은 것이 없었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동안에는 또한 바쁘시게 교회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도 책망하시기 시작하셨다.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남편들은 그들의 아내와 화해하였고,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과 화해하였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친구들이 그들의 친구들에게 "나는 당신에게 나쁜 말을 하였으니, 나를 용서해 주시오 ―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내 마음에 당신을 못되게 굴었소. ― 나는 당신의 뒤에서 흉을 보았고, 미안해요. 내가 당신에게 먼저 와야 했소" 라고 말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18:15)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형제의 뒤에서 흉을 보았으면, 우리는 바로 그는 그의 죄 때문에 지옥불의 위험에 있게 된다.

       이제까지 나를 므푼디시 (Mfundisi) 라고 부르고 있었던 줄루족 사람들이 나를 "바바"(Baba-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보통 줄루족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들 사이에는 바바라는 말을 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선택할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에 놀랐다. 그들은 갑자기 나를 전보다 더 위대하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고, 나를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마저 바치려고 하였다.

       확실히 이렇게 된 것은 영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주님께 굴복하였을 때, 사실상 내 생명을 상실하였다. 나는 성경에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그것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한 증인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바로 우리의 생명이 우리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하여 적절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자유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당신이 공산주의자나 간첩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충고까지 하여 왔다. (: 아프리카 지역에는 의외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자기들의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암살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될지라도 나는 성경에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한 그 말씀을 확증하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죽게 된다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내가 나의 주님을 위하여 가장 크게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위하여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주셨던 주님께 나의 지극한 감사의 마음으로 나의 피를 흘리는 일이다.

 

 

 

6   성령의 역사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强健)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胸背)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10-17)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치고 강림하셨던 날에 그때 우리도 함께 모여있을 동안에 오셨다. 우리는 갑자기 큰 바람같은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작은 경험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희미하게 기억되었고, 분명히 알기를 시도하여 보았다. 이것은 마치 압축된 공기가 공기 펌프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았고, 그 바람이 불었다면 바로 우리 모두에게 불었다.

      하나님의 영이 강림하셔서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여 계신다" 라는 말 외에는 누구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의식하였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머리 숙여 하늘의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였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자리에 강림하셨고, 그 지역 전체를 덮으셨으며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7km나 떨어진 곳에서 사는 무당이었으며, 그녀는 무당 강습학교의 원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제일가는 거점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에 "산들이 당신의 임재 하심으로 녹이는 불탈 때와 같이 무너져 내린다"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모든 것이 마른 잡목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불에 타버렸다. 나는 이 무당에게 "당신이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그녀는 "나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지옥의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분이 이 사슬들을 부셔버릴 수 있을까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도저히 내 눈과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에 때로는 몇 주간씩 무당들을 개종시키려고 하였는데 헛수고였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푸른 신호등이 켜졌는데, 한 무당이 내 앞에 서있고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생애는 병들고 피곤하며, 지옥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누가 당신에게 말했소?" 라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도 안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누가 당신에게 설교하였소?"

     "아무도 안 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오라고 초청하였소?"

     "아무도 안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소. 당신은 어디서 왔소? 무슨 일이 있었소?"

     "왜 당신은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십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오!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나를 구원하시지 못하면, 나는 오늘 죽을 것이고, 지옥에 갈 것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일들을 본 일이 없어서 나는 계속하여 질문해 보았다. "당신은 주 예수님께 당신의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실 수 있습니까?"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그녀는 모든 일들을 다하고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나에게서 악령을 추방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악령들의 이름들을 상상한 개념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이지즈웨, 인다워, 인디끼 ― 등으로 불렀다. 사람이 이지즈웨 악령에 잡히면 그는 자기가 들어보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던 외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무당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전에 한번 귀신들린 사람이 나에게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추방해 볼려고 시도해본 일이 있었다. 그 결과로 나는 악령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때에는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들은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쥐거나,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악령들이 나갔다고 읽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어서 귀신들의 웃음거리가 되고만 것이다.

      이제 나는 여기에 서서 이 무당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나는 5, 6명이나 되는 동역자들을 함께 모여 그 여인을 가운데 앉히고 우리는 둘러 앉았다. 이 여인은 문맹자로서 아주 동떨어진 시골에서 살아서 구라파 사람들이나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던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주변에 의자에 앉아서 승리할 것을 울부짖으며 부활절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활하셨다 ― 그는 전능하신 승리자이시다 ― 그는 마귀를 이기셨다 ― 그는 죄와 사망을 극복하셨다 ―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 그는 자기의 피로 댓가를 지불하셨다! 라는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우리가 이 찬송을 되풀이하고 불렀을 때, 그 여인은 갑자기 그녀의 의자에서 뛰어올라 그녀의 손과 무릎을 흔들면서 무서운 야생동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움켜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표정이여서 우리의 동역자 한 사람은 놀라고 질겁하여 방에서 뛰쳐나갔다.

      우리는 그를 다시 불러 진정시킨 다음에 예수님이 마귀의 모든 권세를 파 하였슴으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하였다. 그때 그 여인은 한번도 학교에서 배운 일도 없는 영어로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그녀의 속에서 많은 개들이 짓기 시작하여서, 창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내 형이 아주 큰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제법 먼 거리에서도 그 소리를 듣고 뛰어와서 창문 너머로 다른 개들을 찾고 있었다. 이제 바로 한 마리의 개를 유인할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이 지난 다음에는 그녀의 속에서 돼지 떼들이 꿀꿀거리고 꽥꽥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때에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으로 암흑의 권세를 떠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그 여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많은 무리의 목소리로 "우리는 삼백의 강한 병사들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어떤 다른 세력들이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서 말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 주님, 이 사람을 놓아 주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때 갑자기 귀신들이 특기할만한 말을 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 아들도 알고 있지만, 성령이 오게 됨으로 우리는 지금 불타고 있다. 성령의 불이 너무 뜨겁구나" 라고 소리 질렀다.

      이 때에 나는 성경의 말씀이 기억났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4:6)의 말씀이었다. 에베소서 6:12에서는 사도 바울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나에게 있어서는 알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영계의 세력에 대항하여 씨름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그것이 영에 대한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들 암흑의 영들과 싸우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첫 100의 귀신들이 많은 크고 날카로운 소리로 외치면서 떠났다. 그리고 두 번째 100의 귀신들이, 세 번째 100의 귀신들이 떠나버렸다. 그 순간까지 이 늙은 '상고마' (무당) 의 얼굴은 어둡고 무서운 표정으로 남아 있었지만, 악령들이 그녀를 떠나는 즉시, 그녀의 얼굴 표정은 갑자기 변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온 성도처럼 훌륭하게 보였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과 눈에서 빛났다. 그녀는 "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옥의 사슬을 부셔버리셨습니다" 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후에 그 무당이 무당 의사들에게 왔을 때 귀신들린 사람들이 날마다 줄줄이 찾아왔다. 우리는 2, 3개월 동안은 전혀 잠잘 수가 없었다. 밤낮으로 바쁘게 지냈는데, 때로는 식사하는 시간이나 옷을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문자 그대로 그런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을 우리들에게 오게 하였다. 우리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누가 당신들을 여기에 데리고 왔소?"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았소."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고, 누가 오라고 했소?"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는 되풀이하여 똑같은 대답을 받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였다.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어떤 힘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죄 뿐이었다.

      아마 이것이 약한 성이었다면 산산이 무너졌을 것이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왔을 때 그 귀신들은 이름과 숫자를 밝혔다. 그때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보다 더한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가 그들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이런 일들을 체험했어야 했다.

      우리가 마푸물로에 있었을 때 언제나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우리는 낮에는 언제나 정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이나 밖에는 200명 가량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중죄인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울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요?" 라고 물으면, "우리는 죄인들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죄를 책망하였고, 하나님의 의가 그들 자신의 불의를 책망하셨던 것이다. 이는 마치 심판 날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나는 므싱가 (Msinga) 에서 왔다는 한 거친 줄루족 사람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매 맞은 사람처럼 방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너무 소란스럽게 소리 내고 있어서, 그 방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았다. 내가 그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지금 나와 지옥 사이는 한 치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 치만 더 나아가면, 나는 그곳에 떨어질 것입니다" 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우리는 되풀이 하여 그 사람들에게 다시 확신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피는 당신의 모든 죄를 씻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대답할 수 있도록 "당신은 우리의 지은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라고 하였다. 이런 믿음의 확신이 깊어졌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일반적인 신앙고백은 충분치 못했다. 그들 각자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직접 고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 때에 빛이 비추면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들의 얼굴과 같이 빛났다.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왔고, 그들의 심령 속에 큰 기쁨을 남겼다. 그들의 생활이 변화되었고, 모든 것들이 새로워졌다. 여인들이 집에 돌아왔고, 남편들은 기뻐서 "당신, 무슨 일이 생겼소. 당신이 새사람이 되었네! 이제까지 당신이 이상한 바지들을 즐겨 입었고 언제나 막말을 하였는데, 지금은 갑자기 유순한 사람이 되었네!" 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회초리로 다스렸는데, 그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들짐승처럼 하였다. 그는 아내의 현저한 생활변화로 그는 놀라서 아내에게 "어째,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내가 술마시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 언제나 싸웠는데, 지금 당신은 너무 조용해졌어!" 라고 말하였다. 이제까지 보통 남편에게 거칠게 부르고 말하였던 대신에 지금은 친절해졌고, 발을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가져왔고, 침대의 모포도 감싸주었다.

     그는 아내의 이런 변화된 생활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이 있게 하였소? 보통 당신은 쉽게 화내었는데 지금은 한마디도 안하고 너무나 조용해요. 나는 지금 왕이 된 기분이요. 혹시 당신이 마프물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보러 가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까? 그래 당신이 그 백인들의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까?" 그리고 계속하여 "그 백인들의 하나님이 당신을 길들이고 관리하였으며, 내가 매로 다스리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값진 일이 될 것이야" 라고 말하였다.

      여러 해 전에 남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서커스 단장이요, 사자 조련사가 "나에게 어떤 사자라도 데리고 오면 내가 그 사자를 길들일 수 있는데, 내 마누라만은 길들일 수 없어요"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가 갑자기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놀라겠는지 상상해 볼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은 자기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된것이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도 우리에게 와서 구원받았다.

      어린이들도 개종하여 그들이 집에 돌아갔을 때 그들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얘들아! 갑자기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너희들은 언제나 서로 다투었어. 너희들은 숙제나 집안 일들을 할 때에 언제나 불만을 토하였고, 언제나 한가롭게 노닥거렸어. 그런데 이제는 순종하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어. 무엇이 너희들을 그렇게 변화시켰어?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냐?" 라고 물어보았다. 이런 일들로 마침내 그들의 부모들도 예수님께 나와 구원받아 헌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의 불을 지피셨고, 이 불이 모든 골짜기와 산들에 요원의 불같이 번져서 한 주간 동안에 수천 명씩 구원받았고, 심지어는 하루 동안에도 그렇게 되었다. 이런 사역들이 남아프리카의 줄루 (Zulu)족 사람들과 코사 (Xhosas) 족 사람들에게서 크게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에는 어떤 제한이 없었다. 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초막절에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중들 복판에 서서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7:37-38)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성경에 말씀한 대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허락하신다. 나는 부흥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실 부흥의 역사는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들의 일상적인 성실한 신앙생활의 결과라고 믿는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밀접한 사귐이 발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순박한 신부가 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7  동반되는 이적과 기사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6:15-18)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시작하였을 때 사람들의 영과 몸이 마푸물로에 모여들게 하였는데, 그것은 이적과 기사가 일어났던 사도행전의 역사가 다시 일어났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열정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주님, 당신은 전과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은 우리는 자신들이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이며, 우리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제1세기의 초대교회에서는 역사하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똑같은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하시고 계심을 체험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치유함 받았음을 체험하였는데,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치유를 위하여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단순히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치유함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 전에 갑자기 치유함을 받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배시간 중에 주님께서 치유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감격하여 "우리는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겠어! 이제는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 라고 환성을 질렀다. 우리는 솔직하게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경고하여야 했다. 이렇게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후에 그것을 지키지 못할지라도 쉬운 일이 된다.

      사람이 자신의 몸 상태가 좋아졌을 때, 그 사람은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귀는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마귀는 지옥에서 그의 모든 무리들을 데리고 와서 그 사람에게 씌워서 두통이 일어나게 하여 마침내 아스피린을 먹게 한다. 그 순간 그의 맹세가 깨어져서 죄를 짓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만약에 일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약이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후에 지키지도 못할 어떤 약속도 하여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가 가끔 약속을 해도 지키기 전에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는다. 주 예수님께서는 대 심판 날에 우리들의 한평생을 살아온 계산서를 내라고 요구하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23:21)고 말씀하신 이유가 된다. 내가 이것을 언급함은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때부터 줄루족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백인들의 종교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그런 말을 하는데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하나님도 되심을 체험하였다.

       나는 갑자기 눈을 뜨게 된 소경을 기억하고 있는데 아래 위로 걸어 다니면서, 머리를 흔들며 되풀이하여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병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며, 때로는 그들이 예배시간 전에 일어서서 주변을 걸어 다녔다.

     가끔 이런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이방인들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우리 이방인들은 옷을 입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옷을 입지 않아요" 라고 말한다.

     여러 해 전만 해도 백인들에게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 여인 사이의 다른 점들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은 서로의 다른 점들을 더 이상 찾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옷을 입는 방법으로 말할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을 절반만 입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방인들이 그렇게 말하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

      한 번은 큰 종창이 난 사람이 엉덩이 아래부터 절름발이가 되어서 우리 집회에 참석하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서서 한쪽으로 갔다. 나는 "무슨 일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의 종창이 터져서 고약한 냄새가 그 주변에 퍼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협동 사역자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씻고, 그들이 상처의 치유를 마쳤을 때에 그는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그 많은 것들 중의 몇 가지만 소개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 ( 21:25) 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이미 부흥의 역사에 대하여 몇 권의 기록된 책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행하신 역사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역사의 조금만 취급해보는 결과가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환자들에게 그렇게 역사하셨어도 우리들의 기도와 애씀에도 불구하고 6년 전부터 치유 받지 못했던 소녀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되풀이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 주님, 그 소녀와 그의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이제까지의 방법대로 역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간구하였다. 우리가 뉴 하노버 (New Hanover) 에서 예배드릴 때 그녀의 어머니와 딸이 천막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스릴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그날 저녁에 그의 자비하심으로 그 소녀를 돌보시어서 그녀를 완쾌시키셨다.

     한 사람이 치유함을 받거나 개종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가 복 받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보통 몇 주일 후에 복음을 설교하려고 그 지역에까지 와서 우리들의 수확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모든 일들은 한 사람의 개종한 것과 그 사람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우리가 야외집회를 열도록 초청받았다. 우리는 그 초청을 수락하였고, 화요일 오후 1시에 집회를 가지기로 약속하였다. 줄루족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엄수에 관심이 많지 않다. 그들이 1시로 정했으면 2시쯤이나 오게 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날에 우리는 그 약속한 곳에 12 30분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3, 4백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놀라서 "당신들이 벌써 여기와 있었어요? 당신들이 언제 도착하였어요?" 라고 물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여기와 있었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물론 그 시간은 그들이 집을 떠난 시간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시간씩이나 걸어서 오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복음을 갈망하였고, 그런 열정으로 그 먼 거리를 달려오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집회가 시작되기 6, 7시간씩이나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그때에 가능하면 집회를 짧게 가졌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긴 설교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그들의 죄를 깊이 깨달았고, 신앙고백을 확실하게 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를 준비하려고 낡은 농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동역자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문제를 확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나는 신유에 대하여 몇 마디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규정으로 그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치유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신유의 역사는 언제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야고보서 5:16에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교훈하고 있다. 언제나 영혼의 치유가 첫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나는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거나 "나는 지독한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등의 다른 불평을 말할 때에 우리는 이들에게 "좋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육체적인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먼저 당신의 영적인 병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사역의 우선 순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심령 속에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분노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명 속에 분노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들의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8에서 기도할 때에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권면하였다.

      어떤 사람이라도 기도할 때에 그의 생활에서 복수할 생각이나 분노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서로 대조되는 면이 있다. 성경에는 여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기도할 때라도 그의 아내에 대하여 기분 나쁜 일이 있어 방해를 받게 된다면 그만큼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던 안 하던 누구나 기도해야 할 때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고 말씀하셔야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가 범법자인가, 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잘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상담하려고 올 때에 우리는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왔을지라도 육적인 병은 2차적이고, 영적인 병부터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영적인 병이 있는 사람들은 잘 자극을 받으며 분노하고, 원망하고, 그 외의 일들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에게 놓임을 받는다는 것이 육체적인 병을 치유 받는 것보다도 천 배나 더 값진 것이 된다. 부흥의 시기에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와서 "우리는 병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걱정은 하지 않아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면 우리는 영적인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집회에서는 사람들은 종종 그의 심령의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때도 있다. 때로는 해가 저물어서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면 그들은 "아니요, 집에 돌아가서 좋은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들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도, 온 세상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한다.

      가끔 사람들은 그들이 신앙상담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몇 일씩이나 기다려야 했고, 그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 기회를 얻게 되기까지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 짓는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런 상담의 일을 위하여 집회를 가능하면 짧게 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나는 짧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바빴는데, 갑자기 한 동역자가 와서 나에게 "밖에 힌두교를 믿는 여인이 와서 목사님과 얘기하고 싶어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지금은 바빠서 안 되겠어! 이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그 여인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나에게 보고해 주시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동역자는 그녀에게 가서 그 말을 전했지만 그녀는 더욱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동역자에게 자신의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동역자는 나에게 돌아와서 그녀는 단지 목사님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다시 동역자를 보내서 그녀에게 내가 대단히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음을 전하게 하였다. 이렇게 몇 번 하는 사이에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렇다면, 내가 가지.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좋으니, 가야지" 라고 말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와 그녀의 열 여섯 살 된 딸이 함께 온 것을 알았고, 그녀는 "목사님, 여기 있는 내 딸을 보시지 않습니까? 내 딸은 나면서부터 정신적인 불구였는데 아무래도 뇌가 파손된 것 같습니다. 나는 내 딸을 여러 의사들에게 보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내 딸은 죽을 때까지 이 병을 고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딸을 힌두교 사원에 데리고 갔지만 우리가 믿는 신들은 내 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2 주 전에 나는 줄루족 흑인을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왜 당신의 딸을 마푸물로로 데리고 가지 않았소? 그곳에는 주 예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당신이 당신의 딸을 그곳에 데리고 가면, 그들이 당신의 딸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며, 그 예수님이 당신의 딸을 고치실 것이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분이야 말로 내가 섬기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에 내 딸이 치유함을 받았고, 정상적인 마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라고 말했지요. 여기에 내 딸이 있습니다. 목사님, 내 딸과 말씀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녀의 딸에게 인사를 건넸고, 정말 그 딸은 완전히 정상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는 당신의 하나님을 잘 섬기시오" 라고 권면하였는데, 그 딸이 "우리들이 믿는 힌두의 신들은 나를 고치지 못했지만, 당신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고쳤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전 세계에 소리쳐 선포해야 했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같은 하나님은 없으시다! 세상 나라들이 이것을 알게 될 때에 만주의 주님이 되시고, 만왕의 왕 되시는 그분 외에는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문제 있는 지역중의 하나가 투겔라 페리 (Tugela Ferry) 주변이다. 약 백 년 동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피살된 전쟁으로 그곳은 황폐해져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이 험악한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한 주말인 금요일, 토요일, 주일 등의 집회를 계획하였는데 그 집회장소가 넘치도록 사람들이 많았다. 집회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상담을 받기 위하여 머물러 있었다. 나는 부흥의 역사가 터지기 전에, 보통 사람들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앞에 나오라고 구원 초청을 하는데, 부흥의 역사가 터진 후에는 이런 것이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사도들이 오순절 날에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권면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2:37에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호소하였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하였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라고 구원 초청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인도해 주시면 그렇게 해도 좋기 때문이다.

      투겔라 페리에서 처음의 한 집회가 끝난 다음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에 남아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기 전에는 집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너무 피곤하여 동역자들에게 "나는 지금 꼭 누워서 조금은 자야겠어. 여러분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내방으로 오시오" 라고 말하였다. 한밤중이 되어 그들이 내방에 와서 나를 불러 "아직도 약 200명의 사람들이 남아서 치유의 기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 사람들이 상담을 하였고, 하나님과 화평을 한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이 야고보가 그의 편지에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5:16)고 말씀하신 대로 하였는가" 라고 물었다. 그들은 ".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말하였지요. 그러나 아직도 200명 가량이 남아서 특별한 제목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이 모든 사람들 각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기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는 보통 가장 어려워하는 경우의 사람들이 도움을 구할 때에, 그들의 23% 정도를 선택하여 그들을 개인적으로 기도해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룹으로 집단적으로 기도해 주었다.

     이 때에는 그곳에 10명의 소경들이 있었는데, 우리 동역자들이 "우리가 이들 소경들을 구별하여 기도할 수 없겠느냐?" 라고 물어왔고, 나는 그들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우리가 그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부분의 소경들이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침 받았습니다" 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임재 하심이 그렇게 능력으로 역사 하셨슴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나가서 사람의 손으로 안수하기 전에 이미 주 예수님께서 안수하셨다. 10명의 소경들이 모두 고침을 받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10명의 소경들이 치유함 받음과 관계되는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금요일 오후에 한 백인 동역자가 집회에 참석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화물자동차로 투게라 폐리로 가는 길이었다. 40, 50km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한 여자 소경이 아이와 함께 길가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손은 그 차를 멈추려고 들었다. 운전수는 차를 길가에 세우면서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 여자 소경은 "이 근방 어디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거기에 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날 좀 그곳에 데려다 주시지 않겠소?" 라고 호소하여 왔다.

      운전수는 "미안하네요. 이 짐 차는 꽉 차서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가 없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짐 차에 자리가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느 구석인가 더 태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탄 하중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중이 지나치게 초과한 상태였다. 이 동역자는 그 부인에게 자기들의 실정을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그녀는 울기 시작하였고, 동역자는 다시 문제의 가능한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제 유일한 가능한 해결책은 한 두 사람이 자원하여 이 차에서 내리면, 당신이 함께 갈 수 있어요"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 낯 선 들판에서 남아 있으려고 한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울고 있는 그 나이 많은 여인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그 일이 있었던 것은 금요일 오후였다. 토요일 저녁 늦은 밤에 투겔라 폐리에서 10명의 소경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기적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주일날 오후에 두 백인 동역자가 다시 자신의 중량을 초과한 그 화물차를 몰고 전날 그 여인을 남겨두고 떠났던 지점을 지나는데 그들은 그 눈먼 여인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기쁨이 넘치고, 밝은 표정을 지은 여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기뻐할 것은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치유하여 주셨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제 병이 나았어요?"

      "어제, 토요일 날이요."

      "몇 시요?"

      "밤 늦게요" 라고 그 여인은 대답하였다.

      그들은 그 시간을 비교해 보고 주님께서 다른 10명의 소경을 치유하고 계셨던 바로 그 시간에 치유 받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여인의 심중을 살펴보셨고,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제 사람들이 "세상은 다른 신은 없고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투겔라 페리에서 그 주말에 일어난 또 다른 일은 그것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들것에 실려 온 한 소녀가 강대상 가까이까지 들려왔다. 나는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의 집회 동안에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송장처럼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부림치는 노력으로 오른손의 한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외에는 그녀의 손가락들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에 그녀가 겪었던 슬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18개월 동안 온몸이 완전히 마비되어 다섯